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라위 왕조 (문단 편집) === 외세의 침공과 근대화 시도 === ||[[파일:탕헤르 모로코.jpg|width=400]]||[[파일:압둘라흐만 모로코.jpg|width=452]]|| || 탕헤르의 옛 미국 영사관 건물 || 압둘 라흐만과 아비드 친위대 || 압둘 라흐만은 국내의 지식인들을 등용하고 점차 확대되는 서유럽 세력의 영향력에 맞섰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모로코의 경제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고, 세수로는 정부 지출이 충당되지 않았다. 이에 압둘 라흐만은 30년 이상 중단되었던 대외 무역을 재개함과 동시에 [[바르바리 해적]]들을 후원하였다. 다만 후자로 인해 분노한 유럽 열강들이 모로코 해안을 공격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1828년 영국이 탕헤르를 봉쇄하였고 1829년 [[오스트리아 해군]]이 라라셰, 아실라, 테투안을 포격하였다. 그러던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하자 모로코에서는 알제리 지원을 위한 여론이 들끓었고, 많은 무기와 자원자들이 알제리 저항군 지도자 압델 카디르로 향하였다. 1837년에는 모로코의 울라마가 지하드를 제창하는 파트와를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압둘 라흐만은 프랑스에게 모로코를 침공할 구실을 주기 싫었고, 최소한 표면상으로나마 중립을 표방하였다. 그럼에도 1844년 압델 카디르가 모로코로 망명해오자 이를 거부하지 못하였고, 여론의 성화에 피난처를 제공해주어야 했다. 그의 예상처럼 프랑스 군은 이를 구실 삼아 침공, 같은해 8월 우지다 부근 이슬리 전투에서 모로코 군을 괴멸시켰다. 같은 달 프랑스 함대는 탕헤르와 에사우이라를 포격하였고, 이에 압둘 라흐만은 1844년 10월 탕헤르 조약과 1845년 3월 18일 랄라 마기나 협정에 서명하여 프랑스의 우위와 알제리 지배를 인정하였다. 더이상 술탄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압델 카디르는 자치적이던 북부 리프 지방에 피신했다가 1848년 결국 프랑스에게 항복한다. 한편 1845년 이후 압둘 라흐만은 후계자인 아들 무함마드에게 군대의 근대화를 도맡게 하였다. 후자는 튀니지 장교들을 초청하여 신식 군대인 아스카리를 창설, 기존의 아비드나 구유쉬를 대체하였고 알제리 주둔 프랑스 장교[* 조제프 드 사울티. 이슬람 개종 후 압둘 라흐만 알 알리로 개명함]를 로비 끝에 개종시켜 그의 지도 하에 페스에 무기 학교인 마드라사 알 무한디신을 건립하였다. 또한 무함마드는 친히 공학과 과학에 대한 유럽 서적들의 번역을 이끌었고 지브롤터와 이집트의 영국군에게 모로코 포병들의 정기적인 훈련을 부탁하였다. 한편 19세기 중반 반프랑스 감정이 심화된 와중에 식량난에 시달리던 살레 주민들이 프랑스 물품을 약탈하자 1851년 프랑스 해군은 살레와 라바트를 포격, 포대를 파괴하였다. 이로써 살레의 관민 20여명이 희생되고 시가지 상당 부분이 전소하였다. 다만 수비대의 대응에 프랑스 군 역시 4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하였다. 이후 프랑스가 탕헤르 역시 포격할 것이라 협박하자 11월 압둘 라흐만은 (약탈에 대해) 10만 프랑의 배상금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1856년에 모로코는 영국에게 관세를 10%로 낮추는 무역 협정을 맺었고, 외세의 간섭이 본격화되던 1859년 8월 압둘 라흐만은 37년의 재위 끝에 사망하였다. 사후 아들 무함마드 5세가 계승하였다. 그는 개혁을 이어나가려 하였으나 곧 스페인과의 전쟁에 직면하였다. 1844, 45, 48년 리프 지방 부족들의 세우타와 멜리야 공격에 대한 (10년 후의) 보복을 핑계로 1859년 말엽 4만 5천의 스페인 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탕헤르, 테투안, 아실라를 포격한 후 세우타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에 부분적으로 근대화된 모로코 군 역시 북상하여 맞섰다. 그러나 1860년 초엽 테투안 전투에서 승리한 스페인 군은 테투안을 점령하였고, 4월 무함마드는 와드 라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모로코 군은 6천의 전사자를 내었고 스페인군 역시 전사 1200에 2900여 병사자를 내었기에 휴전은 빠르게 성사되었다. 모로코는 스페인에게 서남 해안의 시디 이프니와 북해안의 자파린 제도를 할양하고 200만 두로의 배상금을 납부하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 선교가 공인되었고 테투안에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스페인은 최혜국 지위를 얻었다. 스페인 군은 영국에게 빌린 돈에 의해 배상금 납부가 완료된 1862년에야 테투안에서 철수하였다. 여러 노력에도 패전하고 경제 위기에 몰린 무함마드는 절망하여 학문에만 열중하며 사실상 정사에서 물러났다. 한편 재정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부족 지도자 (암가르)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였고, 그들이 거부하자 카이드 (장군)를 대신 파견해 이를 강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카이드들이 해당 부족들을 기반으로 기존 이상의 자치를 구가하자 중앙 정부는 더욱 약화되었다. 암울한 상황에서 1873년 무함마드는 사망하였고 동생 하산 1세가 계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